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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l 2000.07.21
대학가요제 이야기 1

"1.

고등학교 재학시 나의 꿈은 명문 대학에 입학하는것도 아니오, 예쁜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아닌 단지 한 곡이라도 좋으니 내가 만든 곡을 씨디로 만들어보고 싶은 소박한 바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소박하고 욕심없는 꿈이었지만 사실 그당시엔 평범한 일개 고등학생으로선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당찬 소망이었다.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본 결과 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단한가지 방법은 가요제에 출전을 하는 것이였다. 다들 알겠지만 비록 상을 못타더라도 일단 본선에만 진출하면 그 해의 가요제 앨범에 곡이 실릴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욕심이 나는 행사였다. 대학을 가야지 하는 굳은 의지의 원동력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믿지 않겠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음대 작곡과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좌절해 있었던 상태였기때문에 그저 난 빨리 이 입시 고문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짓(?)을 할 수 있는 그저 '대학생'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해마다 유심히 강변 가요제와 대학가요제를 체크하면서 부푼 꿈을 다스리지 못해 며칠동안 멍하니 도서관 구석에서 상상의 나래에 젖어 있었던게 그 시즌에 찾아오는 일종의 증세였다. 심지어는 상을 받을때 이렇게 수상소감을 얘기할까 저렇게 얘기할까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기'가 힘든 고 3생활을 버티게 했던 나만의 유희중 하나였다고 얘기하면 너무 거만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꿈을 크게 갖는것과 허상속에 빠져 사는것의 경계의 설정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은 이런 나의 실태를 여과없이 주위 친구들에게 노출시키는 바람에 한때 잠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내스스로 난

당연히 가요제에서 상을 받을 수 있을것이라 굳건히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견디기 힘들었던 수험생 시절을 하루 하루 이겨내기 위해 기댈곳이 필요했던 나에게 그런 상상은 유일하고도 매우 효과적인 도피처였을 것이다.

2.

동욱이와 나란히 같은 대학에 입학하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거침없었다. 갑자기 넘쳐나는 자유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행복에 떨었던 우리는 잠시 우리를 버티게 했던 음악에 대한 열정에 등돌린채 각자의 생활에 바빴다. 동욱이는 미식축구부에 가입해서 영차영차 훈련에 열심히였고, 나는 뜻맞는 대학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름대로 건축학도로서의 새로운 꿈에 부풀었었다. 대학만 가면 매일 만나서 같이 연습하고 곡만들 기세였던 우리는 그룹이라고 만들어놓고 고작 몇주에 한번 만나서 정작 음악보다는 그저 이런 저런 구상과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기 일수였다. 색스폰을 사서 팀에 합류겠다던 다른 친구의 비자금은 my car마련 기금으로 용도가 전환되었고 드럼을 맡았던 친구는 이럴타한 그루브가 전혀 없는 발라드 투성이의 나의 곡들에 흥미를 잃었는지 아니면 원래 무대 체질이었는지 고등학교 시절의 밴드와 어울려 라이브 활동에 보다 열심이었다. 그래도 돌아보면 즐거웠던 기억들이 많다. 영상디자인과에 재학중이었던 친구의 학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중에 원준이형한테 주었던 '쇼'라는 곡을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던 일이나 (지금도 그친구는 그 테입을 언론에 공개하겠다는 장난식의 협박을 하곤 하는데, 정말 상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 앨범을 내보겠다고 다짜고짜 라인기획 ( 당시 신승훈 김건모 노이즈 등의 대거 스타들이 소속되어 있었던) 의 김창환씨를 만나러 갔었던 일은 지금도 두고 두고 회자되는 우리만의 소중한 추억이다. 물론 당연히 보기 좋게 퇴자를 맞았는데, 거절 사유를 대충 요약해보면 가수란 직업이 쉽지 않다. 왜 좋은 대학들 들어가놓고 부모님 걱정하시게 하느냐. 게다가 회사 방침상 군미필자는 자격조건에서 벗어난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어보이니 1년쯤 뒤에 대학가요제에 한번 출전해보면 어떻겠느냐. 사실 지금으로선 나였더라도 그 비슷한 말로 회유했었겠구나라고 보다 어른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그 때 당시엔 어린 마음에 발끈했었던 것 같다. 패전병처럼 어깨가 축 늘어진채 근처 방배동 Cocos에 앉아서 내린 결론은 내년은 무슨 내년. 당장 올해에 도전해보는거야! 안되면 본전이지 뭐.

드럼치던 친구는 개인사정으로 인해 빠지고 동욱이와 둘이서 졸지에 듀엣으로 전락한채 우리는 서둘러 대학가요제 정보를 입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매우 드라마틱하게도 해마다 연말에 개최되곤 했던 가요제가 그 해부터 가을로 앞당겨지면서 덩달아 원서 마감일이 하루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우리는 그 하루 동안 듀엣 그룹명과 곡 선곡 및 제목 정하기, 원서 작성등등의 엄청난 분량의 작업을 모두 해치워야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의미 심장하게 만들어졌을 법한 '전람회'란 이름도 그렇게 한순간에 작명되었고, 피아노와 베이스기타만으로도 안정된 사운드가 나올 수 있는 곡이 필요

했던 관계로 '꿈속에서'라는 곡이 선택의 여지 없이 낙찰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때는 테입심사가 없이 전국의 모든 지원자가 직접 서울에 와서 예선에 참가해야 했었으므로 둘이서 반주를 커버할수 있는 곡의 선택이 필수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