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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l 2003.11.22
갑자기 생각난 친구녀석

갑자기 학창시절의 친구녀석들이 생각날때가 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소식을 듣는다던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은 뚱딴지같이 꿈속에 조연급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생전 연락도 안하고 심지어는 얼굴 본지가 10년이 지난 친구놈도 마치 어제까지 술잔을 기울였다는듯이 자연스럽게 얼굴을 내밀곤 하는 것이다. 그런 계기로 궁금증이 물밀듯 솟아와 인터넷 싸이트를 뒤져 근황을 알아보기도 하고 급기야는 거진 20년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본적도 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참 놀라워서 아예 없어진듯, 완전 포맷해버린 듯이 지내다가도 그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무수한 파일들이 복원되어 어느새 생생해지기에 이른다. 연관된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어느덧 주위의 다른 인물들의 정보까지 되살아 나는 것이다.

각설하고, 어제 런던에서 살다온 후배와 함께 저녁을 먹다가 우연히 제작년 녹음차 런던 방문했던 이야기가 나왔더랬다. 음 그때 재밌게 놀았지 음음 쓰끼야기 돈이 맛있었어 라고 얘기하던중 그 후배가 불쑥 던지는 한마디. '몰라 난 젤 기억에 남는건 우연히 오빠 친구를 만났던거야.'

아..... 그렇지 그때 내가 병찬군을 만났었지.

공항에서 배낭을 짊어진 그와의 만남은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이었다. 얼굴이야 고등학교때 부터 둘다 겉늙었기에 별로 생경하지 않았고 둘다 동반 일행이 없었기에 밀린 얘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저 구석에 처박혀있던 고등학교 시절의 데이타들이 갑자기 열을 내며 활성화되면서 흔히들 그렇듯 옛날 예기 살아온 이야기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3년간 다녔던 회사를 때려치고 그 퇴직금으로 2달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했다고 한다. 흐음 멋진걸. 그리고 나서는 미국에서 삼촌을 도우며 경영을 배워볼까 한다고 했다. 음...그럼 화학과는 괜히 다녔네? 악의없이 무심히 뱉은말에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넌 그럼 건축과 다녀서 음악하냐? -.-;

병찬이는 사실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리게 될 때 빼놓고 지나칠 수 없는 재미난 캐릭터이다.

아마 어디선가 이글을 읽으면 반가워 함과 동시에 자기가 또 놀림감이 된게 아닌가 싶어 분개하겠지만 바로 그게 병찬이의 캐릭터다. 선한 마음씨와 선비같은 유유자적함에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자존심과 승부욕이 적절하게 버무려져서 만화책에 늘 등장하는 주인공의 친구같은 성격이라고나 할까.그 시절을 추억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화가 몇개 떠오른다.ㅋㅋㅋ

일명 '더치파이'사건.

토요일날 수업을 일찍 마치고 친구들과 피자를 먹으러 가는길이였다. 친구들이랑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가는 도중 내가 얘들아 오늘은 더치 패이하자 라고 제안을 했다. 약간의 사오정 귀가 있는 병찬이가 '더치 파이'가 머야? 라고 되물은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장난기 넘치고 영악스러운 나의 친구들은, 음...병찬아 아직 니가 그걸 못먹어 봤구나. 네덜란드식 피잔데 맛이 죽여... 등등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병찬이를 놀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존심에 왈칵한 병찬군이 '아냐. 나 먹어봤어 엄마가 사줘서!' 라고 질러버린것이 두번째 화근이 되어버렸다. 아...우리들은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나올것 같은 상황에서 마치 악마의 사주를 받은냥 급기야는 병찬이에게 더치파이를 종업원에게 주문을 하도록 만드는 상황까지 몰고 갔다.

그 날 이후 아마도 한 1주일은 병찬이를 달래고 사과했던 기억이 있다.

전공이 말해주듯 병찬이는 화학과목을 가장 잘했는데, 나의 가장 취약과목이 바로 화학이였다. 화학 시험 전날쯤 되어도 병찬이는 다른 과목 공부를 한다. 그럼 뒷자리에 앉은 내가 슬슬 미끼를 던진다. 아...화학은 정말 너무 어려워. 병찬이는 너무 좋겠다.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걸 슬슬슬 풀까. 병찬은 미동도 없다. 오히려 고개를 더 책에 파묻는다. 악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다. 그럼 나는 더더욱 깊게 파고든다. 구체적인 문제를 읊으면서 아..., 난 왜 이게 이해가 안될까 바본가봐.... 안되겠다. 반장한테 가서 물어봐야지. 하고 책상에서 일어나려하는 포즈를 취하는 순간, 병찬 참지 못하고 휙 돌아앉는다. 음 이건 말이지 이래서 말이지 이런거야.... 명강의가 이어지고..... 아 역시 병찬이는 화학의 천재야! 라는 나의 감탄사에 우쭐우쭐. 시험이 끝나고 자신이 가르쳐준 문제에 맞는 답을 썼는지까지 와서 확인해주며 책임감을 다하던 그는 결국 나의 화학점수가 자신보다 잘 나오게 됨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시 다음 시험까지 목석의 자세로 돌입한다. (원래 근본 원리를 모두 꾀고 있는 사람들은 문제에만 충실한 자에 비해 함정에 잘 걸리게 되는 법이거든요. 게다가 제가 찍는걸 잘하는데 어쩌겠어요.)

글을 쓰다 보니 언젠가 만나서 10년도 넘은 얘기를 이제 인터넷에서까지 우려먹어서 국제망신시키냐고 펄펄 뛸 병찬군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러고보니 런던에서 생맥주를 기울이며 했던 얘기들도 다 이런류의 가학성 추억들 되새기기 였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니 원래 사람이란게 그 시절을 평생 추억하면서 우려먹고 사는 동물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