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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l 2004.05.11
일본 여행기 #2 'SHINJUKU'


신주꾸는 번화가다. 올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이 넘쳐난다. 타임 스퀘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기서도 흘러가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길 건너편으로 가는 일이 쉬어보이지는 않는다. 수많은 전광판에 현기증이 나서 길을 잃어버렸다면 거짓말이고, 여행사에서 팩스로 넣어준 너무나 절제된 약도만 믿고 무턱대고 약속장소를 정해버린것이 문제였다. 신주꾸역 동쪽 출구로 나와서 쭉 직진하면 된다는 약도는 매우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고속철에서 내려서 출구를 빠져나왔을 때, 마치 처음 서울에 상경한 시골 소년마냥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10년 동안 쓰고 있었던 소음 방지용 귀마개를 막 벗어버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30여분을 헤매다가, 전화기를 로밍 해 온 덕에 결국 무사히 주노를 만난다. 언제나 그렇지만 낯선 외국에서 아는 친구를 만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비록 그것이 미리 계획되어진 약속된 만남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특히나 양쪽 모두 다 낯설고 자기 터전이 아닌 제3국에서의 조우는 더더욱 그렇다. 주노는 버클리에서 만난 후배인데, 친구와 함께 작업을 하기 위해 일본에서 3개월 정도 살 예정이다. 어렸을 때부터 호주, 미국, 파리를 혼자서 전전하다가 이젠 일본이다. 다음 예정지는 영국이라 하니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그의 방랑 운이 어디서 멈추게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호텔은 의외로 찾기 쉬웠다. 딱 예상한 만큼의 크기의 비좁은 객실에 짐을 던져두고 바로 시부야로 향한다. 거기서는 주노의 친구들인 올리비아와 캐롤을 만날 것이다. 그녀들은 자매인데, 언니는 일본에서 꽤 유명한 가수이고, 동생은 버클리에서 재학하던 4년 내내 '얼짱'의 자리를 고수하던 친구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걷자마자 주위에서 남자들이 몰려든다.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서로 음산한 눈짓을 교환하더니만 바로 둘로 쫙 찢어져서 캐롤과 올리비아에게 다가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요즘 도쿄에서는 명품 지갑을 손에 들고 그것으로 지나가는 여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접근하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로 그런 짓을 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상품으로 보이는 구찌 장지갑은 캐롤일행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다. 주노와 내가 조금 구경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살그머니 등장하자 그들은 곧 '낭패로군'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사라져버렸다. 그녀들은 재수 없고 매스껍다며 몇 마디 했지만 그들에겐 이것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인 듯 했다. '이쁜게 죄지 머' 라는 뉘앙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단순한 체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한 접시에 120엔짜리 회전 초밥집에서 배터지게 스시를 먹은 후 그녀들은 약속이 있다며 가버렸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쌍둥이 자매들역쯤에 캐스팅 되면 딱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시부야에서 어슬렁거리기에 지친 우리들은 커피 한잔을 간단하게 마시고 호텔에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서 뒹굴대다가 동네 선술집이라도 찾아 나서기로 한다. 걷는 게 귀찮아서 어디 가까운 이자카야라도 없나요 하고 프론트에 물어보니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사실은 설명을 해주다가 포기하고 약도를 그려주었다.)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게 약간 불안했지만 다른 데를 찾아 나서기가 귀찮아서 그냥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주방장 아저씨 한명과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있는 단촐하고 아담한 선술집이였다. 뜨거운 물수건과 함께 메뉴판을 갖다 주는데 완벽하게 일본어로만 이루져있는것도 모자라 간단한 그림조차 없다. 영어 메뉴는 없나요? 라고 영어로 물어보았더니 너무 미안해하면서 '아 죄송해서 어쩌죠. 우리는 영어 메뉴는 없는데 참 이를 어쩌나...'쯤 되는 일본말로 계속 머라머라 한다. 공항이나 지하철역같이 공공장소가 아닌 곳에서 일본인들의 특징은 영어로 말을 걸어도 일본말로 대답해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미안해하면서. 대답을 안 하고 도망가 버리는 한국인들이나, 화를 내는 프랑스인, 혹은 알아들을 수 없게 빠른 속도로 1분 분량의 영어를 쏟아내는 미국인들보단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오히려 영어로 질문을 한 내가 더욱 미안하고 난처해져버린다. 결국 고민 끝에 종업원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술집 입구에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안주 샘플중 3개를 직접 손으로 가리킨다. 다행이도 모두 맛이 좋아서 사케1병과 생맥주 2잔과 함께 주점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그 안주들만 시켜먹었다. 나의 엉터리 일본어 몇 마디에 힘을 얻은 여종업원은 나중에는 '이젠 우리 주점이 곧 문 닫을 시간이니 마지막 오더를 해주세요.' 라고 수줍은 영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아마 티비를 보는 척 하면서 꽤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문법들을 이리저리 꿰어 맞췄으리라. 편의점에서 녹차 한 병과 물 한 병을 사들고 호텔에 돌아왔다. 면세점에서 사온 마르텔 꼬냑을 마시며 밀린 얘기를 나눈다. 밤은 깊어가고, 술기운은 머리꼭대기까지 차오른다. 낯설고 이국적인 장소에서만 발동되는 마음속의 안테나들이 머리를 곧추세운다. 잠재우며 살았던 여러 불만들과 욕구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주노는 별말 없이 입가에 미소를 잔잔히 띄우고 두서없는 얘기를 끝까지 들어준다. 가끔 꼬냑잔을 홀짝거리면서. 파리에 있는 지현이와 재형형에게 전화를 걸고, 오늘 하루 찍은 사진들을 체크해보고, 일기를 좀 끄적이다가 잠이 든다.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