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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l 2004.05.18
일본 여행기 final '쉼'


모두가 잠자고 있는 사이, 주노가 아침에 장을 봐온 모양이다. 보슬 보슬 비를 맞으며 1시간을 걸어서, 역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이것저것 장을 봐온 정성이 갸륵하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 그리고 바베큐를 위한 쇠고기와 닭고기, 바베큐 소스, 음료수 약간. 이정도만 해도 냉장고가 그득하다. 아침식사는 간단하게 카레라이스와 인스탄트 라면. 밥을 먹자마자 앞마당으로 마실 나간다. 비가 갓 개인 축축하고 맑은 공기 속에서 마시는, 커피 알갱이가 동동 뜬 프렌치 커피 메이커로 갓 걸러낸 커피 맛이 그럭저럭 괜찮다. 정원은 생각했던 것만큼 크진 않지만 아담하고 오밀조밀하다. 집주인의 세심한 정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한그루의 나무도 같은 종류가 없다. 비싸고 고급인 희귀종의 나무들을 골라 심은 건지, 아니면 이웃나라임에 불구하고도 이렇게 바다만 건너면 조금씩 모양새가 틀려지는 건지, 잎사귀 모양 하나하나가 한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정원사의 꾸준하고도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뒷마당에 앉아서 커피를 한잔씩 놓고 앉아 있는데 3명 모두 말이 없다. 각자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표정한 주노는 어쩌면 점심 메뉴를 구상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르며, 뭔가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한 창학형의 깊이 어린 표정 속에는 몇 시 차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지, 혹은 뭐라고 형수님께 변명할까를 궁리하고 계셨을는지도... 내가 멍청하게 하고 있던 생각은 아마도....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혼자서 살면 과연 얼마동안이나 외로움을 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뭐 그런 거였던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며 산책을 하고 집에 들어와 씻고 정리를 하고 보니 어느덧 11시. 창학형이 기차까지 가는 길을 산보겸 배웅하기로 한다. 45분정도를 내내 걸어도 이 동네의 정체를 전혀 알 수 가 없다. 농촌 같기도 하면서도, 농촌 특유의 거름냄새같은건 전혀 느껴지지 않고, 깔끔하게 지어진 양로원 주차장엔 차들이 빼곡하게 주차 되어 있는데, 길에는 사람이 전혀 없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를 제외하곤 너무나도 한가롭고 평화로운 마을. 하늘은 오후에는 갤는지 조금씩 구름이 젖혀가고 아스팔트 바닥은 이미 말랐다. 터널만 넘으면 바로 역이기에 터널 앞에서 창학형과 인사를 하고 뒤돌아 오는데 창학형이 우리를 다시 부른다. 터널 앞 길가의 수풀 속에서 뭔가를 발견하신 듯. 잡초사이에 댓돌처럼 편편한 바위위에 어린 여자아이의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하얀 신발이었는데 검은색 펜으로 이름인 것처럼 보이는 글씨가 씌어져 있다. 누가 왜 이런 곳에다가 이렇게 곱게 신발을 놔둔 것일까. 무언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더 이상은 상상하지 않기로 한다. 점심은 정원에서 바베큐를 해먹기로 했다. 야외에서 먹는 밥은 무조건 맛나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밑줄에 ‘맑은 바깥 공기가 반찬이다’ 라는 구절을 나란히 어록에 첨가해도 좋을 듯싶을 정도로 경치 좋은 풍경 속에서 즐기는 식사는 거의 예외 없이 맛나다. 신선한 버섯을 통째로 굽고, 바비큐소스에 절여놓은 쇠고기와 닭고기 그리고 프랑크 쏘세지 4개. 쿠킹호일위에서 지글거리면서 익는 냄새가 꽤나 자극적이었는지 동네 개들이 왈왈 짖기 시작한다. 시원한 맥주 한 캔과 곁들여서 정신없이 먹다 보니 순도 100%의 포만감과 만족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마음속의 불순물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 설거지를 하고, 이것저것 정리를 한다. 샤워를 하고, 짐정리를 하고,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기행문을 쓰고, 1층 다다미에 누워 책을 읽다가 피아노를 치고, 담배 한대를 피러 정원에 나가니 벌써 어둑어둑하다. 딱 이렇게 며칠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벌써 내일이면 돌아가야 한다. 항상 아쉬울 때 돌아오는 게 기억에 절실하게 남기는 하지만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맛보기엔 역시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오랜만에 듣는 개구리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깔고서, 바쁜 일상에선 꼭꼭 묻어두었던 ‘생각’들을 하나둘씩 끄집어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