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ial website of KIM DONG RYUL

2011

  1. - Oct (1)
  2. - Sep (1)
  3. - Jan (1)

2006

  1. - Nov (1)
  2. - Oct (1)
  3. - Sep (83)

2001

  1. - Nov (1)
  2. - May (1)
  3. - Feb (2)
yul 2008.12.06
2002 월드컵 이야기 #2

그는 여름학기가 시작되고 3주나 지난 후에야 보스톤에 돌아왔다.

트렁크를 끌며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모습을 보고 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홍색의 'Be the reds' 대표 팀 유니폼을 아래위로 갖춰 입고 나타난 것이다.

첫 경기만 보고 돌아오겠다던 그의 결심은 한국이 폴란드를 2대 0으로 이기고 나자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포르투갈전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부모님 돈으로 유학하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졸업쯤이야 1년 미루면 어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했다.

짐을 풀기도 전에 내 손을 붙잡아 나를 식탁에 앉히자마자 그는 월드컵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 서울의 모습에 대해 침을 튀기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너무 잘해. 말도 안되게 잘해.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다니! 미쳤어. 선수들도 미치고 관중들도 미쳤어. 국민들도 미쳤어. 이런 광경은 정말 처음이야.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서 난리도 아니었어.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차 본네트 위로 올라가서 방방 뛰어도 앉아 있는 차주인은 그냥 마냥 좋대! 아... 형이 봤어야 하는데......"

마치 폭격이 난무하는 전선에서 가까스로 첫 취재를 마치고 살아 돌아온 종군 기자 같았다. 한국의 승전보와 국내 분위기는 인터넷을 통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의 생생한 설명은 살짝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진실'을 사실에 가깝게 나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복음 전파의 수준이었다. 축구 몇 게임 이겼다고 온 대한민국이 그렇게 뒤집어진단 말인가. 도대체 축구가 뭐길래.

"형... 이걸 읽어봐. 형을 위해 사왔어."

그제서야 트렁크를 열더니 책 한권을 꺼냈다.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틈날 때 보겠다고 말하고는 그만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나는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내일 오전 수업 때 제출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벌써 한 시간 째이다. 슬슬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내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

"형. 꼭 같이 봐야해. 정말 이건 역사적인 순간인거야. 우리나라가 16강에 올랐다고. 우리 세형이네 집에서 다 모여서 밤새고 보기로 했어. 같이 보자! "

"왜 세형이네에서 봐? 우리 집에서 안보고?"

"우린 위성티비가 없잖아. 미국에선 일반 채널에선 월드컵 중계 안 해 준단 말야. 그리고 해 주더라도 지네 경기만 해주겠지. 위성 티비로 봐야 해."

"밤새고 다음날 학교는 어떻게 가려구? 수업 안 들어? 너 가뜩이나 3주나 빠졌잖아. 너 빵꾸아냐? 너 그러다가 나랑 같이 졸업 못 할 수도 있어."

순간 그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내 바뀌더니

"형 지금 수업이 문제야? 형...아 나 참..."

그 후로 이어지는 그의 설득과 회유는 너무나도 맹신적이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나는 비애국자였다. 이건 축구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나의 짜증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숙제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절대 밤을 새가며 경기를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밤을 못 새는 체질이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새벽시간에 경기를 관람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나도 아마 기꺼이 함께 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이 모든 걸 무릅쓸 만큼 축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다음날의 수업 때문에 사양하겠다는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묵살되었다. 그에게 월드컵은 이미 한낱 축구게임이 아니었다. 설득과 회유를 반복하던 그는 안되겠던지 이젠 애원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뭔가 어둠의 그늘에서 날 구원해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 월드컵이 끝나는 그날까지 날 괴롭힐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던 찰나 갑자기 나는 묘안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