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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2012.05.01
각자의 여가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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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아를의 오후.
일행들은 소위 '작품 활동'에 열심이다.
아티스트인 지현이는 거실 창가에 앉아 파리의 미술용품점에서 사온 수채화용 작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고, 작가 후배는 노트북을 붙들고 그동안 틈틈이 수첩에 펜으로 끼적였던 메모들을 정리하여 글쓰기에 한창이다.

반면 음악가인 나는, 냉장고에서 카라멜푸딩을 꺼내 소파에 앉아 책을 보며 뒹굴 거리고 있다. 창조적이며 예술적인 이 아름다운 풍경에 나도 한 몫 하고 싶은 맘이 없지는 않으나,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딱히 없다. 기타라도 칠 줄 안다면 조그만 휴대용 기타라도 들고 왔을 테지만, 혹시 몰라 챙겨온 오선지 노트도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백지 상태 그대로일 가능성이 크리라. 

한 달 정도 프랑스 여행을 다녀온다는 말에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여행의 목적을 물어왔다. 곡 쓰러 가는 것이냐, 프랑스에서 공연 계획이 있는 것이냐. 혹은 여행기를 써서 책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있었다. 어쩌면 보통 사람들에게 '한 달'이란 시간은, 그냥 휴식으로만 보내기엔 너무 길고 아까운 시간 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이번 프랑스 여행에서 꼭 무언가 유형의 결과물을 만들어 와야 한다는 기대나 중압감은 애초부터 없었다. 외려 그 반대로 나는 그것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숙소에 그럴듯한 피아노가 있었다 하더라도, 혹은 내가 최소한의 작업이 가능할 정도의 포터블한 시스템을 챙겨왔다 하더라도, 별로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손대지 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일할 땐 일하고 쉴 땐 철저히 쉬는 멋진 프로이고 싶어서도 아니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충분히 굶주리고 싶다.

일상에서 나를 성가시게 하는 크고 작은 일들에서 벗어나, 기름기처럼 머릿속에 끼어 있는 잡다한 걱정거리들을 덜어내는 다이어트에 가뿐히 성공하고 싶다. 가능한 구석구석 깨끗하게 비워서 돌아가고 싶다. 

손에 닿는 거리에 놓여 있어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연주할 수 있고 녹음할 수 있었던, 그러나 평소엔 잘 만지게 되지 않던 피아노와 장비들에게서 떨어져, 그것들의 부재를 점점 그리워하면서 안달하고 싶다.
그런 조급한 청개구리 같은 심보의 간절함이 가라앉을 무렵, 보다 검소하고 정갈해진 내 안의 열정과 의욕, 그것들과 조용히 조우하고 싶다. 
그것들을 꼭꼭 담아가서 서울의 익숙하고 편한 내 공간에서 조심스럽게 풀어놓고 싶다. 그리고 그것들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되기를 바란다. 

20대에는 이런 사치스러운 과정이 불필요했었다. 그 땐 하루하루가 새로운 경험이었고 의욕의 원천이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예민함과 기민함은 서서히 노련함과 성숙함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이런 현실이 예술가에겐 때론 큰 벽이 되기도 한다. 젊은 시절 좀 더 많은 곡을 써 놓을 걸 후회하는 것은 소용없다. 각자 나름 그 나이의 맞는 방식을 찾으면 되니까. 그리고 나에겐 그 방법 중 하나가 이런 장기 여행이 된 것이다. 

지현이는 창가 양지바른 귀퉁이에서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그림 한 장을 남겨놓고 혼자 영화를 보러 나갔고, 작가 후배는 아까아까 끝난 듯한 원고를 벌써 몇 십 분 째 팔짱을 낀 채 노트북 모니터가 뚫어져라 째려보고 있다.

나는? 

오징어 짬뽕 컵면에 부을 물을 데울 예정이다.